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갑시다[2019. 5. 26]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詩)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꽃”을 묵상해 보면 사람은 관계적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서로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존재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관계적 존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영적(靈的)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성경 속에 많은 이야기를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를 만나신 예수님을 통해 이 사실을 너무나 잘 깨닫게 됩니다.

삭개오는 여리고에 살고 있던 세리장이요 부자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 19:1-2). 그런데 그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19:3-4). 삭개오가 키가 작았다는 것은 일반적 의미에서 키가 작았던 것이 아니라 아주 작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본문에 “작은”이라는 단어가 ‘미크로스’( , micro)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극단적으로 작은’이라는 말입니다. 삭개오는 거의 난쟁이 정도를 벗어난 키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러한 삭개오는 성장과정에서 심리적인 고통과 어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친구도 없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요즘 말로 왕따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러한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다가 삭개오를 쳐다보시면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시면서 그의 집에 가서 머무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삭개오 일생일대의 복음이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상대해주지 않은 삭개오였는데, 주님께서 그의 이름을 먼저 불러 주시고 그의 집에 가서 머무시겠다고까지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 한마디에 지금까지 삭개오의 열등감과 미움과 원망과 좌절감과 마음의 무거운 짐 등 모든 것이 싹 해결되었습니다.

이는 삭개오의 다음 반응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곧 삭개오는 뽕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삭개오는 주님께 여쭙기를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고백이었습니다. 삭개오의 이러한 고백과 결단에 대해 주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삭개오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에 주님께로부터 먼저 부름 받은 우리가 가족, 일가친척, 이웃 등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주님을 함께 증거 하는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만용

2019-06-16T20:51:32+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