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그 제자들의 어록을 담아 기록해 놓은 「논어」(論語) “자한”(子罕)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子曰 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
(자왈 가여공학, 미가여적도, 가여적도, 미가여립, 가여립, 미가여권)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함께 도(道)로 나아갈 수는 없고, 함께 도(道)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입장을 같이 할 수는 없으며, 입장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상황에 따른 판단을 함께 할 수는 없다.”
사람은 어느 누구든지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익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솔로몬 같은 경우도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전 7:28)고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는 사람과의 관계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초지일관(初志一貫)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 도우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1-5)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성령께서 붙드시고 도우시면 변함없는 믿음을 가지고 저 천국을 향하여 이 땅의 순례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가능한 곳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스데반과 사울(바울)의 관계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과 바울은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최고의 랍비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이나 바울은 자신이 믿고 있는 그 신앙을 위해서는 목숨도 내어놓는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에 핍박자로 활동했습니다. 동문수학했던 친구 스데반의 죽임을 마땅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잔멸하고 예수님 믿는 성도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핍박자 바울을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시고 그를 이방인 복음전도를 위한 택한 그릇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울은 회심 이후 평생 성령께서 그를 붙드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스데반이나 사울(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우리 성도들의 삶에도 성령께서 도우시고 인도하셔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살아가는 동안 사람의 도움은 언제나 한계가 있음을 알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초지일관(初志一貫) 변치 않는 믿음으로 승리하는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