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30일(월) 시찰회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함께 수련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충남 예산의 예당저수지에서 예배를 드리고, 추사고택(秋史古宅)과 해미읍성을 둘러 보았습니다. 추사고택을 둘러보는 가운데 추사 김정희 선생의 생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1786년 6월 3일 충남예산에서 태어나 1856년 10월 10일 71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그는 조선후기 실학에 정통한 고증학자였습니다. 그는 경학, 불교학, 금석학, 문자학, 사학, 지리학, 천문학 등에 능통했습니다. 무엇보다 추사체라는 자기 나름대로의 독툭한 글씨체를 완성하여 명성을 날렸습니다. 또한 1844년(헌종 10년) 세한도(歲寒圖)를 제주도 유배 당시 그려 자신의 제자였던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추사고택 옆에는 추사기념관이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일대기와 여러 업적에 관한 기록과 전시물들이 있는 곳입니다. 추사기념관을 둘러보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글귀를 보았습니다. 곧 “내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되지만, 나는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대단히 겸손한 말씀임과 더불어 학문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던가를 엿볼 수 있는 글귀였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벼루 열 개를 밑창 낼 정도로 글쓰기와 학문에 전념했다는 것은 사실 웬만한 사람은 흉내 내기가 대단히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또한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 정도까지 글을 쓰고 공부했다는 것은 가기 상상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이 글귀를 음미하면서 우리는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구원을 위해 주신 생명의 말씀을 과연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가? 나아가 몇 번 정도 성경책을 교체할 정도로 마르고 닳도록 읽고 애독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학문을 공부하는 학자들이나 학생들은 죽도록 공부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말씀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참으로 나태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다시금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얼마나 사모하고 사랑했던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곧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1) 나아가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시 119:147-148)라고 노래합니다.
영적 갈급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찾고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시편 119편 기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9편 기자는 에스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스 7:1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이 먼저 정통하기 위해 부지런히 연구했으며, 말씀을 준행했으며, 말씀 교육에 전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람들이 각기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옛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은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먼저 믿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말씀 읽기와 묵상과 실천을 통해 날마다 승리하는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