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2019. 7. 21]

철학(哲學)을 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철학은 많은 명제들을 가지고 있지만 “죽음”의 주제는 빼놓을 수 없는 철학자들의 고민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많은 헬라 철학자들은 죽음을 ‘육체의 해방’으로 여기면서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던 중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분하여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을 만나 변론하고 또한 저자(장터, marketplace) 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에비구레오(Epicurean) 와 스도이고(Stoic)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하였습니다. 이들은 바울에게 이르기를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라고 하면서 조롱하고 혹은 이르기를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라고 햇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에비구레오(에피큐러스 철학자들)와 스도이고(스토아 철학자) 철학자들이 볼 때에 몸의 부활을 전하는 것은 그들이 이제껏 해결해 놓았던 죽음의 문제를 다시 뒤집는 말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육체의 해방, 진정한 자유라는 것으로 죽음을 정의해 놓은 것에 대해 몸의 부활은 다시금 육체의 감옥에 갇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함과 동시에 육체의 부활에 관해서도 증거했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왜 오게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아담 이후 모든 자손은 원죄를 안고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댓가로 인해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의 문제는 예수님께서 대속(代贖)하심으로 해결된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가 해결된 모든 성도는 영생의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다가 주님 품에 안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생애를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동안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이 기회입니다. 죽으면 기회는 영원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살아 있는 동안이 기회임을 말씀하십니다(눅 16:19-31).

살아 있는 동안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며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물질, 권력, 지식, 쾌락, 명예 등에 집착하면서 어리석게도 죽을 때에도 그것을 가져갈 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 6:7-12)라고 말씀합니다.

삶과 죽음은 우리에게서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음을 알고 지족(知足)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의 삶“(시 116:9)을 살아감으로 모두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만용

2019-07-29T20:41:06+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