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詩經)의 “소비편”(小毖篇)에 “자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번역하면 “내가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을 인용해 조선 선조때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지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년) 선생은 ⌜징비록⌟(懲毖錄)을 썼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부터 1598년까지의 전반적 전황에 대해 류성룡 선생이 기록했는데, 그는 자신이 직접 겪은 임진왜란에 대해 그 원인과 전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임진왜란 당시 자신이 군무와 국정 전반을 책임지고 있었기에 당시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후세를 교육하고 경계하기 위해 ⌜징비록⌟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아주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사료로서도 그 중요성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전체 16권 7책으로 되어 있고, 우리나라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징비록⌟의 영어 표기는 “Jingbirok” 혹은 “The Book of Corrections” 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근세사에 아주 중요한 징비록이 또 하나 있습니다. 곧 백선엽 장군이 기록한 ⌜6․25 징비록⌟입니다. 이는 1,2,3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1장 군(軍)은 어떤 존재인가부터 제 19장 용문산의 설욕까지 6․25 전쟁 당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인 백선엽 장군은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모친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6.25 전쟁 당시 북한 김일성의 기습남침에 맞서 싸운 최고 전쟁영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낙동강 방어선을 펼치고 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가운데 있을 때 김일성의 최정예 3개 사단에 맞서 다부동에서 전투를 치루면서 대구와 부산을 지켜낸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당시 다부동 전투 상황에서 하마터면 나라가 끝장날 뻔 했던 부분이 있는데, 그때 당시 상황을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지휘하고 있던 11연대 1대대가 다부동 좌측방의 고지를 적에게 내어주고 물러나면 천평동 계곡의 미군이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1연대 1대대 병사들이 고지에서 밑으로 무질서하게 밀려내려 오고 있었는데, 그때 1대대장을 붙잡아 세워 앉히고, 마구 후퇴하는 병사들도 우선 땅바닥에 앉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대구와 부산만을 남긴 상태다. 이곳을 지키지 못해 대구를 내준다면 우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바다에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여러분 모두 그동안 잘 싸워줘서 정말 고맙다. 그러나 한 번 더 힘을 내자. 저 밑 계곡에서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는 중이다. 우리가 먼저 물러나면 저들은 곧장 철수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 대한미국은 망한다. 내가 먼저 앞장 설 테니 나를 따라와라. 그러다가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본인이 권총을 빼 들고 선두에 서서 앞서 나아가자 물러섰던 부하들이 뒤를 따라 “이제 우리가 나아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그곳을 지켜냈다는 것입니다. 지휘관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백선엽 장군의 ⌜6.25 징비록⌟1,2,3은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필독서입니다. 그는 자신이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해 2016년 7월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60여년 전의 전쟁을 우리는 많이 잊고 있다. 그 점에서 나는 이 책의 제목으로 380년 전 출간한 류성룡 선생의 ⌜징비록⌟(懲毖錄)을 떠올렸다. 6.25 전쟁 당시 우리가 보였던 진짜 모습을 바로 적어 다스리고(懲), 후대가 이를 참고함으로써 스스로의 결점을 극복해 후환을 경계토록(毖) 하기 위해서다…전쟁을 직접 지휘한 야전의 경험자로서 내 눈에 비친 한반도 사람들의 싸움 기질을 여기에 적는다. 노병이 적는 이 ‘징’과 ‘비’의 기록이 앞으로 우리가 헤쳐가야 할 많은 싸움의 과정에서 튼튼한 초석의 역할로 작용한다면 더 이상 바람이 없겠다.”
서애 류성룡 선생이 ⌜징비록⌟을 기록한 것이나, 백선엽 장군이 ⌜6.25 징비록⌟을 기록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러한 기록이 없으면 그때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반복될 수 있는 국가적 어려움을 제대로 대처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두 분이 기록한 징비록의 독자(讀者)로서 감사드리며, 모두에게 일독(一讀), 아니 몇 독(讀)을 권해봅니다.